단군왕검은 고조선을 세운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옛날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위하여 동굴에 들어간 이야기들 한번쯤은 들어본적이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시절은 어떤 생활풍습과 배경이 어땠는지 당시 고조선의 생활모습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칠일과 백일잔치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100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것 이라고 했는데 곰은 21일만에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100일과 21일을 출산, 육아 풍속과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1일은 아기를 낳은뒤 산모와 아기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기간인 삼칠일을 뜻하고 100일은 백일잔치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단군왕검 이야기는 청동기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청동기를 만들어 쓴때를 청동기 시대라고 합니다. 청동기 시대의 특징은 농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단군왕검과 같은 지배자가 등장해서 일반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라고 합니다. 단군왕검 이야기에 따르면 화웅은 비, 구름, 바람을 다스리는 신하를 거느리고 내려와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비, 구름, 바람은 농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연현상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매루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인간의 360여가지 일에서 360은 일년을 뜻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웅은 1년동안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사건들을 처리하는 지배자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가 새로 나타난 지배자이거나 새로 나타난 지배 집단의 대표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와 환웅의 결혼은 짐단과 짐단의 결합을 뜻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집단마다 곰, 호랑이, 새같은 특별한 동물을 섬겼습니다.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토테미즘은 당시 원시신앙의 한 종류 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어떤 동물이나 식물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하게 여겨 숭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곰이 여자로 변한 웅녀와 환웅이 결혼한 것은 곰을 섬기는 집단과 환웅집단이 결합했음을 의미합니다.
정치와 제사를 지배하는 단군왕검
곰을 섬기는 집단과 환웅 집단이 결합해 세운 나라의 우두머리가 단군왕검입니다. 단군은 제사를 주관하느 제사장이란 뜻이고 왕검은 정치를 주관하는 임금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은 제사와 정치를 관잘하는 최고 지배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사를 정치와 뗄수없는 아주 중요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하늘신 태양신과 같은 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지배자만이 할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렇게 제사와 정치를 하나로 생각하는 것을 제정일치라고 하며 단군왕검은 제정일치 사회의 최고 지배자였습니다.
고조선의 본래 이름은 조선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말의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일연은 위만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옛날의 조선이란 뜻에서 옛고(古)자를 붙여 고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은 아사달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아사달은 태양이 뜨는 자리라는 뜻의 우리말입니다. 세계여러나라에는 저마다 자기 나라를 세운 조상에 대한 신비한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건국신화라고 하는데 신화는 있는 그대로 믿기 어려운 만큼 신비롭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신화는 당시의 역사적인 현실을 담아서 지은 이야기이고 그 신화를 간직해온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단군왕검 이야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과 생각, 감정이 깃들어 있다고 말할수 있다고 합니다.
단군왕검 이야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내용이 덧 붙여지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조선의 생활모습
고조선 사람들은 잡곡밥에 반찬으로는 채소, 산나물, 물고기 등을 먹었습니다. 쌀밥이나 고기는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잔치나 제사 때가 되어야 먹을수 있었습니다. 양념으로는 소금, 콩을 발효시켜 만든 된장과 간장을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단군왕검에 나오는 마늘과 쑥도 이당시 널리 사용되었던 양념이라고 합니다.그런데 이때 먹었던 마늘은 지금의 마늘이 아니라 달래와 비슷한것이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마늘은 기원전 2세기 이후 중국의 한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김치는 오늘날의 김치와는 달리무를 소금에 절인 것이였다고 합니다. 요즘과 같은 고춧가루를 넣고 빨갛게 만든 김치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부터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그릇은 주로 흙을 구워 만든 토기를 사용했는데 나무로 만든 그릇도 당시 함께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정성껏 만든 음식을 토기 또는 나무 그릇에 담아서 짐승의 뼈나 나무로 만든 숟가락으로 먹었습니다. 옷은 삼베, 모직,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습니다. 신발은 대개 짚신을 신었지만 높은 신분의 사람들의 경우 가죽신을 신고 가북 모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표범가죽과 호랑이 가죽을 중국에 수출할정도로 고조선에서 생산하는 가죽은 품질이 좋았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집은 신석기 시대의 움집 보다 조금 더 땅위로 올려 지은 반 움집의 형태가 일반적이였습니다. 땅을 약간 파고굵은 나무로 기둥을 세운다음 서까래를 올리고 짚으로 지붕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습기를 없애기 위해 바닥의 흙을 불에 태워굳히고 그위에 짚을 엮어 만든 자리나 나무 껍질을 깔았습니다. 한족에는 족구들을 놓아 난방을 했고 넓은 집에서는 필요에 따라 공간을 나누어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조선 사람들은 마을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서로 협동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벼,콩,조,기장,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곡식을 길렀습니다. 목축도 발달하여 개, 돼지, 소, 말등을 길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농기구는 돌로 만든 석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청동기는 만들기도 까다롭고 몹시 귀한것 이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무기나 제사용 기구 장신구로 주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고조선 후기에 이르러 철로 만든 농기구가 널리 쓰이면서 농업의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고조선 사람들은 춤과 노래를 좋아했는데 그래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행사가 열리면 모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당시에는 뼈로 만든 피리나 하프와 비슷한 공후라는 현악기를 주로 연주 했습니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토기는 민무니토기 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 빗살무늬를 새긴것은 토기가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갈라짐을 막기위해 무뉘를 새길 필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추수철이 되면 사람들은 반달돌칼을 이용하여 벼를 거두어 들였으며 사람들은 잡곡밥을 주식으로 해서 먹었습니다. 또한 고조선은 사회질서를 알려주는 범금8조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역사책(한서)지리지에는 고조선에 범금 8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범그 8조는 모두 세 조목뿐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을 다치게 한 사람은 곡식으로 갚아야 한다.
도둑질한자는 도둑맞은 집의 노비로 삼는다. 노비를 면하려면 50만의 돈을 내야한다.
범금8조는 당시 고조선의 사회질서를 알려주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고조선은 개인의 재산을 보호했으며 노비가 있고 노비를 부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음과 동시에 왕과 귀족의 지배층이 있다는 점 평민과 노비가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고조선이 중국의 한나라와 싸우고 있을 무렵 만주와 한반도에는 고조선 외에도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과 같은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나라들은 모두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한뒤 가장 부강한 나라로 손꼽혔다고 합니다. 삼한은 한반도의 남부에 자리를 잡은 마한, 진한, 변한을 말하는데 삼한의 풍습은 서로 비슷하였고 동예와 옥저의 풍습은 고구려와 비슷했을것이라고 추측한다고 합니다. 동예와 옥저는 날로 강대해져 가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후 지배를 받으며 결국 흡수되었고 삼한은 백제와 신라 가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