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강국이 된 고조선의 역사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무렵 중국은 전국시대를 맞이하여 싸우고 있던 시기라고 합니다. 전구 7 울 중에 하나인 연나라는 고조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습니다. 그래서 고조선과 연나라는 수차례에 걸쳐가면서 싸웠습니다.
그 후, 진나라가 중국의 전국시대를 통일하였으나 15년 만에 그만 멸망을 하게 되고 한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중국은 또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하여 고조선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연나라가 있던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많이 넘어왔는데 그중에서 위만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고 1,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학자들은 위만이 중국사람이 아니고 연나라에 살았던 조선사람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관직과 서쪽 땅 100리를 주었지만 그 후에 위만은 준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쫓겨난 준왕은 배를 타고 남족에 있는 진국으로 달아나게 되었는데 위만이 고조선이 왕이 된 때부터를 우리는 위만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위만이 왕이 된 후에 고조선은 더욱더 강력한 나라로 거듭나게 됩니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에는 한반도와 만주, 요동반도를 포함한 그 일대를 차지한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한 강대국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조선은 한반도 남쪽에 있는 변 한이나 진한, 동해안에 있는 동예가 한나라와 직접적으로 교역을 하는 것을 막고 두 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큰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조선 시대의 유물인 청동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 모양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초기의 것은 비파형 동검이라고 불렀으며 그 후 나중에 나온 동검을 세형동검이라고 불렀습니다. 비파형 동검은 주로 만주 요령 지방에서 세형동검은 주로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이 발견된 지역이 서로 다른 것은 고조선 영토의 변화와 아주 밀접 하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조선의 관직
고조선의 관직은 중국의 관직과 달랐습니다, 니계상, 상, 대신, 장군 등의 관직 이름은 고조선 고유의 말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상은 귀족 세력의 대표자로 짐작이 되었으며 그리고 상 앞에 붙은 조선, 니계는 지역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즉 니 계상은 니계를 대표하는 귀족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역 이름이 붙지 않은 상은 중앙의 조정에 있는 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귀족 회의의 대표자로 왕에 버금가는 존재였고 대신은 큰 관리라는 뜻으로 상과 비슷하거나 상 밑의 고급 관리였고, 마지막으로 장군의 군대의 지휘자였습니다.
고조선의 멸망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전 109년 한나라 무제는 사신 섭하를 고조선에 보내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한나라를 섬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의 세력이 점점 강해 지자 군신 관계를 맺음으로써 고조선의 성장을 미리 막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쉽게 한나라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신 섭하는 한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배웅 나온 고조선의 비왕장을 죽이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우거왕은 그 길로 바로 군사를 보내게 되어 한나라의 사신으로론 섭하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한 무제는 크게 진노하였고 그해 가을 한나라의 두 장군인 양박과 순체에게 5만 명의 군사를 내어주면서 고조선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한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게 됩니다. 한나라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난 후에 다시 공격을 하여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왕검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싸웠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서 계속 싸우자는 강경파와 강화를 맺자는 온건파로 의견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조선상 역 계경은 강화를 주장하다가 남쪽으로 가 버렸고 조선상 노인, 상한 음, 장군 왕 겹은 몰래 성을 빠져나가 한나라에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거왕이 계속 싸울 생각을 굽히지 않자 니 계상 참은 부하들을 시켜서 우거왕을 죽이게 됩니다. 우거왕이 죽은 후에도 왕검성은 한동안 무너지지 않고 한나라의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 우거왕을 대신하여 성기가 뒤를 이어서 계속 고조선을 지키기 위하여 싸웠던 것이었습니다.
힘으로는 왕검성을 무너뜨릴 수가 없다고 판단한 한나라 장군 순체는 우거왕의 아들인 태자와 조선상 노인의 아들을 꾀어 성기를 죽이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08년 여름 긴 싸움이 시작된 지 약 1년 만에 왕검성은 한나라에 의하여 함락되어버렸습니다. 고조선은 전쟁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지배층의 분열과 배신 때문에 무너진 것이 고조선의 정확한 멸망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검성이 무너지자 한나라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개의 군을 두어 고조선을 다스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조선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번, 임둔군은 곧 없어지고 현도군은 서쪽으로 쫓겨났습니다. 낙랑군은 나중에 고구려를 흡수하게 되었습니다.
미송리형 토기
고조선의 요령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토기로 표주박의 위쪽을 잘라 낸 것처럼 생겼고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옥저와 동예는 어떤 나라일까?
고조선이 한나라와 싸우던 시기에 한반도에는 고조선뿐 아닐라 고구려, 부여, 동예, 옥저, 삼한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옥저와 동예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옥저는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하여 함경도 해안 지방에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왕은 없었으며 읍이나 군으로 삼로라는 부족의 대표자들이 각각 자기 부족을 다스리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옥저는 바다 가까이 있어서 특히 해산물이 많이 생산이 되는 나라였으며 해안가 지방에 있던 탓에 소금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옥저에서는 여자가 10세가 되면 약혼을 하고 신랑이 될 사람의 집으로 가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가 되면 신부는 집으로 돌아와 신랑집에 신부의 몸값을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신랑 집에서 신부의 몸값을 내면 신부는 다시 신랑 집으로 가게 됩니다 이런 풍습을 민며느리 제라고 합니다.
옥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을 얕게 파고 시체를 임시로 묻어 두었다가 살이 썩어서 없어지면 뼈만 추려 커다란 나무 관에 넣었습니다. 이런 풍습을 세 골장이라고 합니다 한가족의 뼈는 모두 같은 나무 곽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투 토막에 죽은 사람의 모습을 숫자대로 새겨 넣고 항아리에 쌀을 담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쌀을 준비해두는 부족만의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활, 과하마로 유명한 동예
동예는 강원도 북부 지방과 한반도 북부의 중앙공원 지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예는 땅이 기름지었기 때문에 농사가 잘 되고 해산물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도한 별자리를 관찰해서 농사에 필요한 절기와 기후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누에를 쳐서 실을 뽑고, 삼을 길러서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도 발달했습니다. 동예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로 특히 유명했습니다. 과하마는 과수나무 밑으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말이란 뜻입니다. 동예는 왕이 없고 후, 읍군, 삼로가 각각 자기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각 읍락 들은 산천으로 작기 영역의 경계를 삼았다고 합니다. 만약 다른 읍락의 사람이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물어내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풍습을 책화라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여와 삼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여가 어떤 나라였으며 부여만이 가지고 있던 풍습은 어땠는지 부여만의 특징과 함께 삼한이 생겨나게 된 배경과 풍속 및 특징 등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