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자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층에게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일어난 1979년 1212 사태가 생소할 것이다. 당시 군사반란인 쿠데타를 통하여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육군 소장.

 

1212 사태를 계기로 군부의 핵심 세력이자 리더가 되면서 자신이 직접 대통령에 오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과 배경을 설명해 볼까 한다.

 

 

1212 사태

 

1212 사태 주요 인물 

 

전두환 씨는 1931년 1월 18일 생으로 2020년 기준 한국 나이 89세의 고령자이다.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제11대 12대 대통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육사 11기로 임관하였고 육사 재학 중 기수별 친목모임이라는 모임의 하나회를 결성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9사단 백마부대 29 연대장, 제1 공수특전 여단장, 육군 1 사단장을 거쳐  보안사령관으로 진급하였다.

 

 

 

 

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전대미문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이 벌어지면서 인생의 전환점과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평소 두뇌회전과 추진력이 강했던 전두환은 이를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군사정권을 이루어 내기로 결심 그 계획을 하나씩 실행하게 된다.

 

 

 

10 26 사태의 주인공인 김재규 당시 중앙 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당시 경호실장을 맡고 있던 차지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재규 중장 정보부장은 이날 사전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서거 소식은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이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총장에게 말을 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 대행을 겸하게 된다.

 

그렇게 비상시국임을 선포하면서 최규하 대행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 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전국은 계엄령하에 놓이게 된다.

 

 

 

계엄 아래 박정희 대통령 서거에 대한 수사를 맡게 될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전두환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은 전두환 소장에게 마치 날개를 달아준 것처럼 전두환이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은 박정희 서거 사건을 조사하던 중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박 대통령 서거 당시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빌미로 당시 자신의 상관인 계엄사령관 정승화 총장을 연행할 계획을 세우게 되고 무력을 통하여 실행. 결국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게 된다.

 

 

 

 

정승화 총장이 연행된 날이 바로 1979년 12월 12일 이날의 일들을 우리는 1212 사태라 부른다.

 

하지만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 대한 연행은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진행된 점에서 논란이 있다. 정상적인 재가 없이 사후재가를 통해서 자신의 행위가 합적적이었다는 주장했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이 연행되고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를 이용하여 다양한 정보를 수집 점차 군인 신분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10 26에 대한 재판과 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가 되면서 당시 대학생들은 군부 통치 반대, 계엄해제 등을 이유로 전국적으로 시위를 하게 된다.

 

 

특히 광주지역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으면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까지도 거리에 함께 나와서 군부세력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결국 군부세력은 시민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부력 진압까지 하게 되면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유신세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진행하던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가슴 아픈 사건이기도 하였다.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한 신군부 세력의  무자비한 방법은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시민들의 저항을 탄압하고 결국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게 된 자리를 물려받아 11대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당시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한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대의원 2,540명이 선출하는 방식의 선거였다. 이 날 참여한 대의원은 총 2,525명이었으며 출석한 인원중 한 명이 부족한 2,524석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결국 자신의 권력과 대통령 당선을 위해 체육관 선거라는 비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서 대통령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듬해 대통령 선거인단 선출을 통한 대통령 선거에서도 당선 12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변경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흘러 김영삼 정부에서 1212 사태 관련,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유죄가 인정되어 구속을 당하였으며 김대중 정권에서 사면받았지만 여전히 추징금은 납부하지 않은 채로 현재도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많은 국민들의 분노를 들끓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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